[책] 내가 늙어버린 여름
저자는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번역은 양영란, 출판사는 김영사. 여기서 나는 저자를 제외하고 모두 친숙하다. 재미있는 일이긴 하다. 닥터스, 쥬라기공원, 만들어진 신, 정의란 무엇인가, 사피엔스 등 집에서 굵직굵직한 책들은 김영사에서 출판해서 참 친숙한 출판사이다. 양영란 번역가는 프랑스 문학 작품 분야에서는 언제나 믿고 볼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다보니 역시나 친숙하다. 그 옛날 좀머씨 이야기의 작화인 장자끄 상페의 만화에 빠져 있을 때 그책들을 참 잘 번역해주신 분이었으니 내게는 너무 친숙한 번역가이시다. 그런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이분은 첨 들어본 분. 이책은 프랑스 문학쪽 서가를 돌다가 찾아낸 책이었다. 21년쯤 출판된 것 같으니 벌써 3년이상이 지난 책이었다.
이동진 문화평론가가 조언을 해주었다.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저자와 목차, 그리고 첫페이지 그리고 책의 마지막 말고 2/3 쯤의 글을 읽어보라고. 2/3쯤에서는 글의 힘이 떨어질 쯤이니 그때까지 글이 힘이 있다면 좋은 책일 것이라고. 이번 책은 첫페이지가 다음과 같았다.
"그 여름, 그녀는 더 숨이 찼고 더 빨리 헉헉거렸다.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점점 더 자주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날이면 날마다, 온 사방의 젊은이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그 여름에, 그녀는 노인이 되었다. "
이 책의 처음 도입 부분은 내게 정말 매력적이었다. 시간을 어렇게 저렇게 함축적으로 쓸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서서히 먹어가는 것일텐데 어떻게 그 여름 딱 한순간에 노인이 되었을까? 40대인 나도 날이면 날마다 눈에 젊은이가 들어온다는 그 말은 왜이렇게 공감이 가는 것인지.. 궁금함을 넘어서 동질감까지 느껴졌었다. 그래서 저자를 소개하는 글을 보니 프랑스인이면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60-70년대 히피문화 및 페미니스트 운동에 앞장선 지식인으로 하버드, MIT 대학의 교수였다. 살짝 히피와 페미니스트에서 이질감 또는 불길함을 느꼈다. 나에게 있어서 히피문화는 집시문화와 반전주의와 섞인 무정부주의까지 막나가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반항하는 사춘기 같은 느낌이면서 하지만 결국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사라진 문화로만 알고 있었다. 거기에 최근 페미니스트 문화는 극단으로 치닫는 느낌이 있는지라 이질감과 불길함으로 서가에 다시 놓을까 고민하다가 너무나 매력적인 첫페이지 때문에 선택을 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좋은 책이다. 늙어가면서 느끼는 감정만 쓴 것이 아닌 저자의 인생의 회고록이었다.
늙어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솔직하게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함께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그 여름에 갑작스럽게 늙음을 보았다. 제일 먼저 나 자신의 늙음을, 그리고 주변 곳곳에 널려 있는 다른 사람들의 늙음을.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판단 따위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다. 젊었을 땐 사회가 강요하는 명령 같은 건 거부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런데 이제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지난 몇 해전부터인가 나는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는 중이다.
스무 살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서른이 되자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마흔이 넘자 청소년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 커플의 어려움 등을 화제에 올렸고, 쉰 줄에 들어서자 리프팅을, 예순이 되면서는 퇴직과 각종 계획(여행, 자원봉사, 요가 등)이 수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
이와 더불어서 구시대 문화에 순응이 아닌 적응을 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스러운 회상(페미니즘은 적응도 부정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저자는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다.)에 대한 가슴 아픈 회고, 자식이 있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는 본인(자식이 없다)에 대한 후회(질투?), 자식같이 사랑하였던 조카의 죽음, 그리고 전형적인(소비 문화와 가족주의가 넘치는) 미국인 남편과의 사랑과 이혼 등등.. 늙음에 대한 생각보다 저자의 굴곡 많은 인생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 좋은 책이었다.
p.s. 중간 중간에 나오는 쓸데없이(?) 방대하게 늘어놓는 읽은 책 자랑들과 페미니스트로서 교수로서 독자를 가르칠려고 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 부분만 참으면 진실된 저자의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